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달빛. 마당, 무엇을 가슴에 담을 까.

황금횃대 2006. 9. 20. 20:10

밖으로 나왔을 때 해맑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절 마당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고, 땅에 떨어진 절 그림자는 유난히 검고 짙게

보였다. 바람이 차디차게 목덜미에 왓 닿는다.

                                      토지 15권 102p

 

보통날은 포도 작업을 밤 열두시까지 한다

차고 안에 포장을 깔고, 그 위에 야외용 메트 한 장 깔구는 학교 급식일을 마치고 포도 작업을 거들로 오는 동서와 마주 앉아서 열심히 포도손질을 한다.

길다란 형광등이 늦도록 불을 밝힌다

흐리면 흐린대로 한 번씩 대문을 닫아 걸며 하늘을 치어다 본다

별이 새파랗게 빛나면 내일은 날이 맑겠구나 ...짐작을 하고, 깜깜 밤인데도 날이 흐리면 구름이 보인다.

집구석을 돌아 가며 심어져 있는 늙은 돌감나무는 벌써 잎들을 떨구고 바람 와샤샤 불어오면 잎사귀는

한 바가지씩 바람에 우수수 날리며 마당을 굴러다닌다.

 

 

그렇게 일하고 들어와 대충 몸을 닦고 누웠으면, 머리 맡에 읽다 만 책을 들었다가도 그대로 골아 떨어지고 마는데, 어제는 포도 밭에서 포도 따다가 노란 섶벌(시동생 말로는 가시개벌이라네)에게 한 방 쏘였다. 그 자리에서 아이구구구 나죽네 하면서 쏘인 다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털퍽 주저앉는다.

유난 벌탐을 많이 하기에 집에 오자 다리를 걷어부쳐 보니 벌겋게 다리가 부어오르고 열이 팍팍 난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연고를 발라도 다리 오금쟁이 부근이 왁씬왁씬 쑤시고 아프다

저녁먹고 <열아홉순정> 연속극 보고는 또 작업하러 나가야하는데 연속극이고 뭐고 누운게 고만 영 일어나질 못하겠다

머리 맡에 읽다 만 토지 15권을 들어서 표시 부분을 펼쳐 읽으려니 저 문장이 나온다. 순간 내 생각은  달빛이 떨어지던 겨울 외갓집 마당으로 달려간다. 달려가서는 머리 속이 온통 하얀 박꽃같은 달빛이 출렁출렁한다. 다리는 욱씬욱씬하는데도 머리 속은 달빛이 환한 그 마당 가운데를 내다보고 있다.

 

전에도 이야기한 경북 달성군 다사면 죽곡리 강창 우리 외갓집.

겨울 방학에 외갓집에 가면 가을 추수 후 새로 이은 이엉이 노란빛을 내며 우리를 맞았다.

쨍허니 시린 그 겨울 밤

저녁 밥 짓느라 불을 댄 방은 아랫목이 갓구운 고구마처럼 뜨끈뜨끈 하였고, 머리를 살짝 숙여야 무사통과 하였던 한짝 여덛이 문. 문 위쪽으로 전선을 몸에 감고 애자가 조롱조롱 매달려있었다. 자다가 문득 오줌이 마려워 눈을 뜨면 하얀 창호 문살 사이로 달빛이 어찌나 은은하게 방안으로 들와 앉았던지 ...자는 외삼촌 얼굴과 내 동생의 배, 이모의 다리에 길게 길게 달빛은 드러누웠다.

참다 참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아! 마당이 환하도록 달빛이 쏟아져....

 

다져진 마당은 시멘트마당 보다 더 깨끗하여 콩타작을 하여도 흙이 섞이지 않았으니.

맨발을 댓돌에 내리면 선잠이 깨고,  밤이 그렇게  늦도록 꼼짝 않고 밖에서 얼은 고무슬리퍼에 발을 걸치면 섬뜻 등줄기에 찌르르 지나가는 냉기.

 

귀신이 나오지 않을까 마음 가득 무섬이 일어도 그 넘의 달빛이 환하면 등 뒤에 무엇이 지켜주는 듯하여.

 

 

 

 

몸은 아파서 입으로는 연신 끙끙 소리를 내면서도 마음 속은 그 달빛 넘치던 마당 생각하느라.

이즈음 촌살림은 어찌나 각박한지, 평생을 가슴에 넣어 두고  힘들 때마다 아름다운 물결로 기억해낼 그 무엇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내 아들, 딸은 훗날 몸이 힘들고 아플 때.....고향집 그 무엇을 가슴에 담아 기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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