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혹은 여자
마경덕
그녀는 무엇이든 가방에 넣는 버릇이 있다. 도장 찍힌 이혼 서류, 금간 거울, 부릅뜬 남자의 눈알, 뒤축 닳은 신발. 십 년 전 가출한 아들마저 꼬깃꼬깃 가방에 구겨 넣는다. 언젠가는 죽은 시어머니가 가방에서 불쑥 튀어나와 해종일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취미는 접시 던지기. 지난 봄, 던지기에 열중한 나머지 벽을 향해 몸을 날린 적도 있다. 틈만 나면 잔소리를 향해, 바람난 남자의 뻔뻔한 면상을 향해 신나게 접시를 날린다. 쨍그랑 와장창!
그녀의 일과는 깨진 접시 주워 담기. 빽빽한 지퍼를 열고 방금 깨뜨린 접시를 가방에 담는다. 맨손으로 접시조각을 밀어 넣는 그녀는 허술한 쓰레기봉투를 믿지 않는다. 적금통장도, 자식도 불안하다. 오직 가방만 믿는다. 오만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터질 듯 빵빵한 가방, 열리지 않는 저 여자.
어제는 어머님과 한바탕 했다.
몸살이 나서 똑 죽겠는데 덮친격으로 영문 모를 하혈이 시작되었다.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라 어제 장날 제사장을 봐왔다
들어 오는 나에게 뜬금없이 남편이 뒤안에 매실액에 손 댔는가 묻는다
저번에 청소 할 때 병에 담은 것은 병에 금이 가서 액이 다 샛고 플라스틱 통에 것은 그대로던데
시장에 가기 전에 양치를 하다가 뒷뜸 분도고모네서 고추 가져 오고 돈을 주지 않아 그 값이 얼마인가하고 어머님한테 생각난 김에 여쭤보았더니 돌아오는 답이 얼음짱이다. "몰라"
또 무슨 일이 틀어져서 저리 심사가 싸나우신가..짐작만하고 장에 갔다왔더니
남편이 묻는 말로 미루어 내가 어머님이 담아 놓으신 매실액을 퍼다 냈다는 말이다.
사흘 전에도 봤을 때는 병 주둥이 아래 조금 내려간 곳에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쑥 내려가고 없더라나
필시 내가 한 병을 따뤄내서 밖으로 퍼 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새파랗게 화를 내시는 것이다. 안그래도 몸이 안 좋아 나도 심기가 싸납다
마루에 앉아 있는 어머님께 병이 깨져서 그렇고 어쩌고 하면서 사정을 설명하고 있으니 일 이년 살은 것도 아닌 어머님하고 나 사이가 결국 이정도 밖에 안 되었나 싶은게 독이 파악 올랐다. 그 때부터 어머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고스방 앞에서 어머님과 나는 싸왔다.
이야기를 듣던 고스방이 내 말을 이해하고 어머님한테 다시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님은 며칠 전에 눈금과 오늘 눈금이 다르다는 이야기만 하신다. 내가 손은 커녕 매실단지 옆에도 근자에는 간 적이 없다고. 추석전에 뒤안 청소하면서 흘끔 본 것이 다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어머님 주장만 하신다.
화가 나서 내가
"어머님 제가 도둑년이네요. 어느 도둑놈이 가져갔냐 얘기하시는데 담 타넘고 들어와 그거 한 병 덜어내갈 도둑이 어디있겠어요 제가 그랬네요"
고스방이 기가찬지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어머님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아들이 엄마한테 눈알 부라리며 고함지르는게 섧다고 안마기 의자를 부여잡고 꺽꺽 넘어가신다. 매실액 한 병에 집구석이 지옥이다.
할 수 없이 내가 잘 못했다고 빌고는 눈물 닦아 드리는데 아버님이 진지 드시러 들어오셔서 그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것참 퍼내지도 않는 일을 사과하다니. 속은 끓다 못해 자지러진다.
오늘 제사 준비하는데 나도, 고스방도 어머님도 일체의 말을 섞지 않는다.
나물을 삶으니까 기다렸다는듯이 어머님이 나오시더니
"나물 무칠 때 밖에 있는 참기름으로 무쳐라"하며 막대기 뿌라지는 억양으로 내지르고 나가신다.
나는 대답을 생략했다.
혼자 음식 준비하고 떡 해오고..지랄발광하니 머리가 터져나갈 것같다.
제사상은 아들놈과 같이 어머님이 차리신다.
모른 척하고 누웠으니 고스방도 암말 않는다
상을 다 차리고 지방이 필요하니 넌즛 고스방이 내가 누워 있는 방에 이야기를 흘린다
"지방도 써야하고 촛대도 가져와야하고..."
먹물로 지방을 쓴다
현고학생부군신위
현비유인밀양손씨신위
현비유인밀양박씨신위
마음 구석이 평안하지 못하니 지방 글씨가 초서가 된다
아흐 이런 필체로 써서 할부지 죄송합니다. 글이 마음이듯, 글씨체 역시 마음이니 어쩔 수가 없으요
할아버지는 첫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사시면서 아버님 형제분들을 다 낳으셨다.
제사상 준비하면서 내가 이빨을 옹실물고 다짐한게 뭐냐면
'아들아, 내 죽거든 제사 절대 지내지 말아라. 정 지내고 싶거던 생크림 케잌 하나만 달랑 사놓고, 내가 이승을 벗어나 저승에서 다시 태어난 걸 축복해주렴!"
낮에 우체부 아저씨가 우편물을 가져다 주는데 시낭송회 안내문이 왔다
어렴풋 알고 있는 마경덕 시인이 대구에 온다네 20일 금요일에
오기로 고만 암말 않고 마시인 뵈러갈까.
안내 자료에 그녀의 시 <가방, 혹은 여자>가 쓰여져 있는데 읽어보니
오늘의 나를 위로해준다.
시의 힘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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