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일찌감치 먹고는 일찍 학교에서 돌아 온 딸아이를 독려해 면사무소 앞에 있는 청소년 공부방으로 왔어요. 얼마 전에 토지 16권을 빌려서 읽고는 이틀 전에는 머리도 식힐겸 고우영의 <수호지>를 빌려서 봤지요. 밤새 10권 읽어내느라 눈알이 시뻘개가지고 새벽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 고요한 새벽 모두 잠든 시간에 홀로 책장을 덮고 쓰릿한 빈 속에 물 한 잔 들이키고는 이부자리 속으로 다리를 뻗어 볼 때....아드드득...그것참 행복합니다.
살림살고 가족들 치닥거리에 푸닥닥거리다 보면 고요한 정신으로 책 한 권 읽어내기가 참말로 힘들고 버거운 일이라, 16권 토지 완결편을 읽을 때는 인터넷 게시판에 사방통문을 보내는 심정으로 소회를 써 보기도 했다지요.
딸래미와 나란히 앉아서 책을 봅니다. <칼의 노래>를 들었어요. 모두 와우~하고 읽을 땐 난 모르쇠하고 외면하다가 가로 늦게 슬그머니 들어서 혼자 불같은 마음으로 읽어냅니다. 작은 버릇이지요. 그러면 그 동안의 외면이 이상한 상승작용을하여 글줄은 꿀처럼 달고 내 가슴과 심정이 받아들이는 속도는 X-speed 버금갑니다.
이제 내년이면 내딸은 고3이되고 최소한 그녀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새우잠도 잘 수 없는 상황이라 그래도 일철이면 고단 몸은 저절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졸고 있겠지요.
늘 딸년한테 한다는 소리란게 "엄마는 대학가지 않았어도 200%의 삶을 산단다"하고 큰소리 뻥뻥 쳐댔는데 점점 그 말이 씨알이 먹히덜않아 이즈음 200% 삶에 대한 증거자료를 하나쯤 내놓아야겠는데 어흑, 아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쌩구라입니다.
옛날 아주 옛날, 스무살 초짜 경리시절에 대학 다니던 이우재 남자 친구가 대학학보를 가끔 보내 주었는데 그 학보 띠지에 주소를 쓰고 짧은 안부 편지를 메모식으로 적어 보냈었는데, 가을 어느 날 보낸 띠지에 신부님 보내신 카드의 전면 시편 귀절이 있었어요. 나는 여태 그 구절이 제 놈이 생각해내서 쓴 것인 줄 알았더만 ㅎㅎㅎ 오늘 신부님 편지 받고 보니 그 귀절은 시편 구절의 <펌>이네요. 짜아식 출처를 밝히는게 예의건만.
가을, 깊어가는 계절에 늘 몸건강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