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
박정대
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
중국 악기를 선물받았다, 중국에 다녀온 친구는 그 악
기를 주면서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이름이 없는 악기도
있냐교, 웃으면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리들
머리 위 아주 먼 곳으로부터 하얀 눈발이 떨어졌다, 나
는, 저 하늘 어딘가에 분명히 눈에 뒤덮인 하얗고 차가운
두 개의 호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
해미읍성은 해미읍에 있었네
손톱을 물어뜯던 겨울 하늘 곁에서 나는 눈이라도 내렸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이어서 가로수들은 잎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때 설령 누가 잎을 가지고 달려
왔어도 내 마음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소
리도 없는 날들이 침묵보다도 더 독하게 흘러가고, 겨울
하늘은 자꾸만 텅 비어가는 링거병 같았다, 환자들로 가
득한 거리가 비명도 없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비명도 없
이 전철이 도착하고, 비명도 없이 애인이 도착하고, 떠날
때는 한꺼번에 모두 비명을 지르며 떠나갔다, 나는 그때
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겨울 하늘 아래서, 화교처럼 나는
외로웠다, 중국 악기처럼 이상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조선 시대 정해현과 여미현의 중간쯤에 몽웅역이 있었
다네
그 몽웅역에 세운 성이 바로 지금의 해미읍성이지
아주 짧고 우연한 여행이 악기처럼 울리 때가 있다, 그
것도 차를 타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팽팽한 현처럼
달려가다, 예산 지나 당진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쏟아지
는 폭설에 툭, 하고 우리들의 질주가 끊어질 때, 줄이 끊
어져서야 비로소 울리는 그런 악기 같은 여행이 있다, 남자
들은 모두 배 타고 중국으로 떠나고, 여자들만 남아 눈
내리는 오후 2시를 지키고 있는 듯한 唐津港, 위구르, 위
루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내륙을 침범해 가는 12월의 차
가운 바람에 눈 내리는 오후 2시의 당진은 거대한 중국
악기, 뜻하지 않은 폭설이 무사와 악사의 경계를 지우며
우리들 생이라는 악보를 뒤덮어나갈 때, 우리는 그저, 저
삼삼한 눈발의 경계를 떠도는 남루한 검객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보다 더
무섭고 아름다운 새하얀 활을 보내, 우리를 연주하는 악
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해미읍성 한가운데 서서 겨울바람을 생각했지
시퍼런 나무들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퉁겨내고 있더군
가련한 해미읍성, 겨울바람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
더군
고대, 장고항, 왜목 마을 지나 우리는 어디로든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에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목포집
이거나 해남집 같은 곳, 그런 소줏집에서 친구를 만나 오
래도록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애무
하던 갈대의 그런 쓸쓸한 이야기를 날이 저물도록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어두운 시간의 저편에서, 아무도 몰래 우리들의 이야기를
연주하는 악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두 개의 호수
아래에서, 그 깊고도 오랜 시간을 사랑으로 內通하는, 이
름을 알 수 없는 중국 악기가
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
해미의 겨울 하늘은 거대한 우주선처럼 해미읍성 한가
운데 떠 있었네
가련한 해미읍성, 울먹이는 겨울 저녁
그곳에서 나는 背敎도 殉敎도 아닌, 오로지 따스한 체
온만이 그리웠네
밥 짓는 저녁 연기 속으로
어린 짐승들, 투명한 공기 속으로 돋아나던 별빛의 길
을 밟으며 일렬로, 집으로 돌아가던 해미의 겨울 저녁
박정대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2001년 민음사
<서울 사시는 오씨아자씨께서 변산반도를 찍으신 겁니다. 파도가 끝내줬어요>
오랜만에 종이에다 진~ 시를 필사해 본다.
이영애는 벽지에 대해 진~생각을 한다고 선전을 하더만.
가는 볼펜이 적당히 한지의 질감을 누르면서 새까만 글자를 토해 놓는다.
그냥 보기에는 술술 볼펜 심 속에 알이 구르면서 가는 대롱 속에 있는 잉크가 흘러 나오는 이치라해도
그 역시 존재이고 보면 속엣것을 내 놓을 때는 아모 아픔이나 느낌이 없겠는가
그래서 나는 볼펜도 잉크를 토해놓는다라고 써 본다.
박정대 시인이 어떤 사람인가 나는 잘 모른다
그냥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다가 몇 안 되는 시집칸에서 뽑아 온 것이니까
<목련 통신>편집장이랜다
그가 어디서 등단하고 이런 것도 나는 관심 없다 저 시, 겨울에 해미읍성에 갔다는 시.
몇 편의 시를 읽어보는데 저 시가 단연 마음에 와 닿는다.
그 와 닿는 대목대목을 여태의 일들과 연관 시켜 풀어놓자면 장장의 사연이 된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 수록 생각나는 옛기억. 그 기억 한 토막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그래, 스무사흘날부터 시작하자.
오월 스무사흘날,
늦은 찔레가 밭둑가에 환하게 피었다
바람이 불면 아카시아 꽃들이 비처럼 떨어져내린다.
패버린 고사리는 이제 넓은 잎을 수놓기 시작했고, 포도순들은 저들의 두가닥 덩쿨손을 마주잡을 태세이다
아무런 흥분도 없이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뒷덜미의 끈끈한 땀들을 씻어 준다.
하루종일 팔을 쳐들고 결속기를 찝어 나가며 포도순을 철사에 잡아맨다
아무 생각도 말기로 했다
단편적으로 떠 오르는 옛 기억들은 그져 하나의 비누방울로 떠 올려 그자리에서 바라보고는 터트린다. 팡, 팡, 팡
설핏 석양이 월류봉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잔잔히 깔린 듯하다
스쿠터 뒤에 따라 붙는 화물차를 확인하느라 뒤돌아본 풍경에 저녁 노을이 그렇게 잠깐 내 눈안에 들어왔다. 스쿠터를 세워놓고 노을을 봤어야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내쳐 달려오고 말았으니.
스무나흘날
만리포에 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모항 1리, 정확히 만리포해수욕장 안에 주소를 두고 있는 그 남자의 집, 혹은 그 여자의 집.
대전에서 스물넷의 앳된 총각과 서른셋의 늦은 츠자를 만나 같이 가기로 하다.
천기는 입안 가득 비를 품었나보다. 마치 다림질 하기 위해 스팀대신에 입 안가득 물을 품고 있을 때의 볼록한 볼때기 그 모양을 구름은 하늘 가득 만들어내고 있다. 눅눅하고 습진 바람이 분다. 그 습한 바람 사이로 고속버스 몸체가 몰고 오는 낯선 바람도 섞여 있다.
대전에서 멀리 정선과 제천에서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려온 두 사람과 더 합류를 하다.
무엇이 이들을 그 먼 발치에서 첫새벽밥을 먹고 떠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금 내색을 한다면 신열이리라. 문학을 향한 열정을 다독이고 눌러 놓아도 이마와 목덜미에 붉은 반점으로 번져나오는 신열.
신열은 신열을 모으고 더 큰 신열의 표식을 만들려는 습성이 있다.
스물넷의 잘 생긴 총각은 집 안에 갑자기 생긴 일로 인해 동행을 포기하고 차 한 대에 둘 씩 타고가는 비 효율적인 길을 떠난다.
정선에서 온 마흔의 총각은 등단한 소설가이다.
혼자서 정선 꼴짜기에 오두막을 짓고, 최소한의 생식으로 마음과 몸을 빙어처럼 투명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그나마 삶의 빛나는 편린들은 소설로 쏟아내고 있으니, 머잖아 그는 내장이 다 보이는 투명한 살갗을 갖게 되리라.
기름기 없는 얼굴이다. 잘 먹고 서방 등처먹고 사는 내 얼굴의 개기름과는 판이하게 다른 메마르고 군더더기 없는 얼굴이다.
제천에서 온 총각은 요새 제 아버지의 집에 노가다 일군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들리는 일설에는 돌아온 총각이란다.
혁명가의 닉을 목에 걸고 다니지만, 전혀 혁명가같이 생기지 않는 곱상한 얼굴에 고운 어깨선을 가진 남자다.
시를 전공하여 가끔 내가 쓴글에 얼토당토않는 해석과 비평을 붙여놓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그는 치열한 글쓰기를 <원>하는 사람이니 봐주자,
소심하고 세심하고 예민하고, 이즈음 엄마들이 키우기 어려워하는 자식의 조건을 그는 다 가지고 산 듯하다. 그러나 천성적인 감성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신도 어쩌지 못한 것.
먼 길이다.
공주로, 홍성으로 예산으로..길은 길로 꼬리를 물고 길 위에 널부러져있다
태안에 들어서자 구름은 입안의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방울 방울 또 방울 비는 차창에 구르듯이 쳐들어왔다. 그러다 어디서 응원군을 만났는지 이젠 떼서리로 쳐들어 온다.
우우우우우우...비들이 몰려오고 우리가 밟아대는 가속의 패달은 갈팡질팡이다. 마음 속에 각자의 크레용을 찾아들고 채색하려 달려 들었던 만리포는 이미 쟂빛의 안개를 저먼저 칠해버리고 낮게 낮게 가라 앉아 우리의 숨통을 내리 누르고 있다.
바람은 이제 한개비씩 부는게 아니라 한 다스씩 뭉텅웅텅 풀어지고 있다
그 남자의 집, 혹은 그 여자의 집
대문 대신 등꽃이 주렴으로 달렸다. 그 고운 보랏빛을 또 어떻게 색칠을 해야하나 머리 속 하얀 도화지 위에서 나는 발걸음이 멈칫한다.
등나무 줄기의 연륜으로 보아 그 집의 현관 문짝이 저절로 그려진다
이 땅에 언제부터 샷슈라는 것이 들어와 우리의 나무 문틀을 빼어내고 자리를 대신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집에는 여전히 길다란 미닫이 문들이 나무 문틀이다.
황토색 페인트가 세월의 깊이로 칠해져 있는 문짝은 열고 닫을 때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을 드러낸다. 낯선이의 낯선 손길을 문짝이 먼저 알아내는, 바닷가에서 단지 몇 발짝만 뒤로 물러 앉은 그 집.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오월의 등꽃이 달리는 집에서 그림처럼 살고 있었다.
비 울음 우는 바다.
술이야 기실 몇 잔 마신게 아니다. 돌아가다 보면 두어번 제 자리에 술잔은 멈춰지는 것이고, 그 잔에는 늘 찰랑찰랑 맑은 액체가 고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꼭 만리포가 아니여도, 그 남자의 집, 혹은 그 여자의 집이 아니여도 어디서든 그렇게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이다.
술잔이 돌아가는 사이에도 비는 우우우우우 울음을 토해냈고, 아뿔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린 술 대신 슬픔을 뒷축으로 꾹꾹 밟으면서 채워넣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나 한 마디 슬픔 뒤엔 또 다른 슬픔이 꼬리를 달고 다음 번으로 넘어갈 때 꼬리에 꼬리에 슬픔은 자꾸 등꽃처럼 매달리는 것이다. 급기야 서로를 찌르기 시작한다. 조심스레 갈무리해둔 삶의 비가들이 여기저기서 툭, 툭,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오...이런...그만, 이제 그만, 그만 하란 말이야!
먼데서 온 여자가 운다
그 여자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데 날보고 언니, 언니 하면서 자그마한 몸을 내 무릎에 얹어 놓고는 훌쩍훌쩍 운다. 등을 두드리며, 좆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다 안다는 척 위로의 느낌표를 그녀의 등에 도배한다.
도배하는 사이에도 바다는 비와 함께 몸을 섞고, 바람은 등나무 줄기에 짙은 애무를 한다. 몸부림.
스무닷새날
새벽은 참 좋다
여전히 비가 내리지만, 눈꺼풀이 천근이지만, 그 북새난리통 중에서도 정신이 오롯 맑아 질 수 있다는 것은 새벽의 기운이 주는 축복이다.
바닷가 억센 경수에 세수를 하고 거무죽죽 내려앉은 생기를 로션으로 피워올린다.
서른셋의 여자는 나에게 갖가지의 여행용 화장품을 권하며 화사한 얼굴을 만들라고 쪼그리고 앉아 시중을 든다
평상시 바다를 담았을 길다란 현관의 오래된 거울은 이 아침 낯선 촌아짐마의 얼굴을 담아 놓고 어쩔 줄 몰라한다.
그렇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늘 비슷한 옷을 입고, 눈에 익은 풍경을 내어놓지만, 바늘끝으로 찌를만큼 세상을 촘촘히 들여다보면 세상을 얼마나 또 세세한 그림들을 찰나의 상영시간으로 내어놓는가......
다시 내가 사는 황간으로 되돌아 올 때는 오롯 혼자 되돌아 온다
들고간 작은 가방 하나에 내 손가락 하나 겨우 걸어놓고서는.
비가 오는 산천은 더욱 푸른 낯빛을 내어놓고 기진한 나는 버스속에서 코를 골며 잤나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수돗간에는 등꽃의 幻影인양 울타리 장미가 환장하게 피었다.
하루 낮, 하룻 밤을 묵으며 일어난 일이, 나에게는 오래 잊혀지지 않는 격렬비열도의 음악 같은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