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옛 사람.

황금횃대 2007. 1. 26. 22:14

낮에는 백화점 식당가 비빔밥집에서 돌솥비빔밥을 먹어요

촌구석에 왠 백화점이냐구요? 아하, 낮에 잠깐 대구 갔다 왔어요

결혼 하기 전, 작은 직장에 같이 다니던 후배들을 만나러 갔었어요

십 오년의 세월도 더 지났습니다

츠자적에 퇴근시간이 되면 아래층에 근무하던 작은 김양과

성서 공장에 근무하던 큰 김양과 사무실 옆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신라면을 끓여먹고, 너구리를 끓어 먹었어요

너구리라면의 굵은 면발이 지금 먹으라면 목구멍에 턱턱 걸리겠지만

그 때 저녁 여섯시 반쯤 되면 굵은 면발 아니라 쇳가루라도 털어 넣으면

소화가 됐을 겁니다.

성서 큰 김양이 빠진 날은 작은 김양과 둘이서 끓여 먹고 퇴근을 했는데

둘이서 세 개의 라면을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웠지요

 

전기냄비와 그릇 들을 대강 부셔서 물 버릴 때가 마땅찮아 이층 난간 밑에

붙여 만든 작은 화단에다 갖다 버렸어요

조붓한 콘크리트 화단에는 남빛 붓꽃이 살았재요

붓꽃은 퐁퐁 헹군 물을 먹고도 여름이면 꽃을 피웠습니다.

 

어쩌다 아주 일찍 회사에 출근을 할 때도 있었어요

철계단을 올라 마악 시작한 아침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층 사무실에 오르면

꽃밭의 붓꽃이 남색 꽃물을 볼따구가 미어지게 머금고는 입이 터질락말락

다물고 있었는데 나는 그 때도 가끔 루피나 수녀에게 엽서를 보낼 때라

엽서에 그림을 그리고 남색이 필요한 날은 병뚜껑을 들고 나가 그들의

뽈때기를 손가락으로 눌러 남색물을 토하게 해서 받았지요

선명한 남색물이 병뚜껑 속으로 쭈르륵 쏟아졌어요

꽃잎은 내 생각보다 여린 피부를 가져서 그 담날 아침에는 쪼그라든 입에 다시는

남색꽃물을 머금지 못하고 시들었지요

 

왜 이야기가 붓꽃 쪽으로 빠졌을까. 얘기하다 삼천포행으로 갈아타는건 내 주특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그 두 김양을 점심 때 만났어요

세월은 큰 김양, 작은 김양, 그리고 나에게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골고루 스며들었지요

 

커피값이 왜그리 비싼지요

돈 내고 커피 먹은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커피값이 그렇게 올랐는지 나는 전혀 몰랐어요

백화점 식당가 중앙에 노천 카페처럼 들어 앉았는데 그냥 울타리도 시원찮아

우리가 나누는 고생한 이야기들이 담 넘어로 마구 넘어 갔어요

 

모카커피를 나와 큰 김양이 시키고, 작은 김양은 카푸치노를 시킵니다.

컵 위로 생크림이 면도거품처럼 얹어 주고, 초등학교 과학 수업 때 쓰던 막대자석

크기만한 쵸컬릿바를 덤으로 찻잔 가에 동그마니 얹어 주더라구요. 나는 그걸 한 입 똑 베어 먹고는

<아. 쵸콜릿이야!>한다는게 <이기 뭐꼬 쬬꼬래또네"하고 뱉고 말았지요

옆자리에는 검은 비즈가 가슴팍에 멋지게 장식된 또래의 아지매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내 발음을 듣고 흘깃 나를 쳐다봤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혼자

움찔해서는 쬬꼬랫바를 생크림 속으로 슬그머니 담궜어요. 그러고는 작은 김양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어요.

 

"언니야, 내 시집가자 마자 공장이 부도나서 시껍했잖아, 고생고생 무지 했어. 울 시엄니는 사람 잘 못 들어와 부도 났다고 우리집에 오지도 않고 날더러는 당신 계시는 부산쪽으로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셨더랬어. 이제 살림이 피고 그런 소문을 듣고는 발걸음을 하시는데 우리집 막내가 돌 땐가 우리집에 처음 오셨다. 그렇게 내한테 서운하게 하셨어도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니까 너무 서운하데. 길 가다가도 어머님 잘 드시는거 보이면 옛날 같으면 사다 드릴 수가 있어도 이제 돌아가셨으니 그걸 하나 사다 드릴 수가 있나...너무 서운해"

 

학교 다닐 때부터 친정집이 어려워 무척이나 고생을 한 작은 김양.

참 야무지고 생각도 바른 아이였세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하려고 애를 쓰고.

이제 집도 잘 살고 친정이며 시댁이며 다 보살피고 산다네요.

덩치도 작은데 살어내느라고 참 애썼구나..하는 맘이 저절로 들어요.

커피 속에 쬬꼴랫이 다 녹아서 그녀의 쓴 얘기를 달달하게 듣게 만듭니다.

보라색 질 좋은 털이 달린 오버코트를 입고, 예나 지금이나 손으로 동작을 많이 하며 얘기하는 그녀의 손목으로 명품모형의 반짝이는 팔찌가 어제 산 듯 빛을 내며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속으로 '고맙다, 고맙다'했어요.

 

큰 김양이 봉사활동 갈 시간이 다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기차표를 끊으니까 한 이십분 시간이 남았어요. 바로 위층으로 롯데백화점이 있는데 혹시나..하고

구경을 갔어요. 울 아덜놈 내년에 입을 점퍼를 하나 살까하고 들어갔는데 촌아지매가 출구를 몰라

땀을 찔찔 흘리며 헤맸어요/ 어라 시간을 보니까 기차 들어올 시간이 다 된거라 마음이 급하니

등때기며 목덜미에 땀이 더 흐릅니다. 이리저리 뺑뺑이를 돌다가 결국 점원에게 물어보니 저리로

나가면 출구가 있을거라 얘기해줍니다.

막 뛰어서 역으로가서 또 기차타는 곳으로 겨우 빠져나가 내려가는데 기차가 들어와요

어이구..차 놓쳤으면 어떡할 뻔했어. 좌석이 없어 입석으로 끊고는 아모 의자 옆 손잡이에 척 붙어

섰는데 내 혼자 속으로 용을 써서 땀이 줄줄 흘러요. 참내.

 

촌 아지매가 따로 없습니다.

맨날 외길에 훤하니 보이는 곳,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 바로 옆인 단순 동선으로 다니다가 휘황한

백화점 물건 사이로 난 길로 접어 들었으니 나의 단순은 순간 방향과 길을 잃습니다.

기차 타고 김천 쯤오니 방송에서 예고한 눈발이 휭휭 날리네요

 

변한다해도 사람만큼 안 변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작은 김양 큰 김양. 십수년 내가 아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센티미터도 비켜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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