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언저리에서 추억하기

황금횃대 2004. 9. 7. 21:59
오늘은 사전 약속도 없이 고스방의 형제들이 다 모였다
위로 시누이 두 형님과 대구 아즈버님, 그리고 막내. 이렇게 약속도 없이 모이게 되었다
큰 시누이는 자기네집 포도 다 따고 우리집 일을 거들어 주러 왔고
작은 시누 형님도 포도일을 마저 거들어 준다고 서울 가서 아들 먹을 반찬을 바삐 만들어 놓고는 다시 이곳으로 내려 왔다
대구 사는 아즈버님도 형님과 같이 오늘 아버님을 뵈러 왔다

닭장에 장닭 두 마리 모가지를 비틀었다
나는 닭 잡는게 무서워 하나로 마트까지 걸어가서 육계 한 마리 사들고 칼국수 샤브샤브 해 먹을 야채를 사서 낑낑거리며 우산 받쳐들고 집에 걸어 왔더니 떡하니 장닭 두 마리를 잡아 놓았다

압력밥솥에 닭을 삶아 육수와 고기를 잘게 찢어서 넣고 두레상을 펴고는 부글부글, 둘러 앉아 칼국수를 끓여 먹는다. 각종 버섯을 넣고, 애기배추와 쑥갓, 양파, 당근을 손으로 듬뿍듬뿍 집어 넣어 익혀 먹는 것은 맛도 맛이려니와 재미가 더하다
큰 형님은 국수만 먹겠다고 기다리는데 내가 막 건져 먹어서 좀 약 올랐을거라

한참 먹고 있는데 가마골 밭에 간 막내, 시동생이 밤나무를 털어왔다.
점심은 점심대로 먹고 또 설거지 하는 사이에 밤을 삶아 내니 작은 숟가락을 들고 모두 그걸 파 먹는다고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는다.

문득 풍경하나가 오버랩된다.

옛날 날이 궂으면 친정엄마는 밀가루 전병을 부쳤다.
둥그런 양철후라이판에 물그래한 밀가루 반죽을 두어 국자 떠 부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당원을 조금 넣어 반죽한 달달한 밀전병. 가난한 집 어린 네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아서 방과 부엌 사이에 난 작은 쪽문을 연신 열어싸며 밀가루 전병 한 판이 구워지길 껄떡거리며 내다봤다. 문을 열면 연탄가스가 코를 찌르고, 그 아궁이 앞에서 어질머리를 느껴가며 자슥들을 거둬 먹였던 엄마를 생각한다.

네명이 한꺼번에 먹으려니 달리 방법이 없다.
둥근 전병 한판을 뒤집게로 열십자를 그어 네쪽을 내어서 접시에 담아 주면, 미처 다음 판의 전병이 구워지기도 전에 1/4쪽짜리 전병은 목구멍을 깔닥깔딱 넘어 가고 없다.
접시에는 그것이 놓였다는 증거로 반들거리는 기름기만 남아 있을 뿐.

한 양푼의 밀가루반죽을 다 구워내도 여전히 1/4쪽의 감질나는 크기는 횟배 앓던 아이들에게 포만이 없었고, 우린 그렇게 컷다.

오늘, 시어머니의 여섯형제중 다섯이 모여 옛날 우리집과 다를 바 없을 그 풍경이 재현되고 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서, 그 누구도 먹는것을 그리워 하지 않고 감질나 하지도 않지만, 연신 밤을 깨물어 반쪽을 내어 숟가락으로 부지런히 파 먹는 모습을 보며 어머님은 고만 뒤로 물러 앉는다. 자슥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심정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가보다.

나는 한켠으로 물러나, 그들과 같이 밤을 파 먹는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먼, 먼, 옛 풍경을 혼자서 넌즛 바라 본다.


얼라리요,
세월은 이리도 뜬금없이 흘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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