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주전자 꼬매는 여자

봄 가방

황금횃대 2009. 3. 26. 18:01

 

 

 

 

 

 

바람이 왠종일 불었다

오랜만에 아모 출입없이 아침 시간을 보내며 아버님 어머님 점심을 차려드린다 딱 열 두시에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 아침 여섯시, 점심 열 두시, 저녁 여섯시, 이렇게 세 번을 성당의 종지기 아저씨가 종을 친다. 황간 들판으로 바람이 종소리를 실어 나른다.

 

지난 주였던가 불이 났을 때가

묵은점과 명륜동은 영동과 황간의 경계지점이다. 묵은점 만데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황간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다. 다행히 발화지점은 황간이 아니고 영동이다. 산불이 난 날 시내까지 재가 날리고 검은 연기가 바람을 업고는 해를 가리며 하늘을 덮었다.

안화리에서 고추대를 뽑고 있던 성하순씨도 놀래서 하늘을 바라봤고, 농협가던 상민이에미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헬멧 앞창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자꾸봤다. 연기는 토네이도처럼 휘감아 돌면서 시내쪽으로 다가왔다.

 

그 날, 밤새도록 17시간 동안 산이 탔다. 대한민국에 소방헬기가 32대라는데 무려 16대가 황간 독골 골짜기 위에 푸다닥거렸다. 물을 어데서 퍼오는지 나는 그게 젤 궁금했다. 헬기는 무슨 바가지로 물을 풀까, 어디 저수지에 가서 물을 풀까, 아버님은 앞 또랑에서 물을 풀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에이 아버님 앞 또랑에 물이 얼매나 된다고 헬기가 그 물을 퍼갈까요? 그럼 어디서 퍼오는거지? 여든 여덟 아버님은 당신 팽생 헬기가 불끄러 왔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우린 또랑물인가 저수지물인가가 일등으로 궁금했고 그 다음이 어데까지 불이 벙깄는가, 그 다음은 누가 불을 냈는가였다. 근데 아무것도 시원스레 알지는 못했다.

 

면사무소 들렀더니 면직원들은 면장부터 시작해서 다 화재현장으로 갔다. 지영이 츠자 혼자서 호적계를 지키고 있다. 한 시간에 백통 넘는 전화가 왔단다. 나도 몇 통의 전화를 받다. 먼데서 모두 <영동 산불>이라는 뉴스 자막 때문에 전화를 했다.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다음 날, 설거지를 서둘러 끝내고 옥포이장하고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노근리 쌍굴다리를 지나 독골로 들어갔다. 안화리 고갯길을 넘어서니 밤새도록 나무와 검불이 타면서 데운 공기가 후끈 얼굴에 쳐들어 온다.  화재현장에 밤참을 해대고 저녁 국수를 삶아 댄 독골이장 문학씨가 입술이 부르트기 직전이다. 부녀회장과 부녀회원들도 늦도록 발을 구르다가 특공대가 투입돼 11시쯤 넘어 오는 불길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단다. 독골 동네가 생기고는 제일 많은 차가 들어 왔고 거기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입술에 바르는 챕스틱을 문학씨 손에 건넨다.

 

산불은 버스 세 구간 길이 만큼의 산을 태우고 소나무를 누렇게 뜨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내년 지나 다음 해에는 솔찮히 고사릿대 올라오겠다는 바램이 비밀리에 바람을 타고 돌다.자연의 순환이란 이런 것인가. 나무가 사라지면 볕이 들고 그 자리에 고사리대가 올라 오고 산나물이 돋아나고. 그러다 어데서 또 나무씨가 떨어지고 나무가 크고....

 

그제는 바쁘게 봄나물 김치를 담는다. 열무김치에 알타리, 부추김치, 그리고 지고추를 담아 놓은 생수병을 잘라, 삭힌 고추를 꺼내 양념에 버무렸다. 대번에 몇 가지의 김치를 담았는데 딸래미 말로는 여전히 영첩반상을 면할 수 없을 것같다. 오후에는 올뱅이국을 끓이다. 지금부터 사다 끓이면 늦가을 까지 이 국을 끓여대야 한다.  시집와서 나는 청춘을 올뱅이국 끓이는데 받쳤다. 겨울에는 선지국을 끓이고, 시레기국을 끓이고..그리고 제사날이 오면 탕국을 끓였다.

열무김치 꺼리를 다듬고 씻으면서 늙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의 세세한 줄거리를 지금은 잊었다. 그래그래 늙는것은 이런 것이다. 순간 번득이며 자리 잡은 귀한 것도 가뭇없이 빠져나가는 것,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는 것.

 

이렇게 몇 마디 주끼는데 고스방이 퇴근을 해서 내 옆에 의자를 끌어 땡기며 앉는다. 나는 쓰는 걸 멈추고 용건을 묻는다. 무엇을 원하시능교?

"여편네야 돈도 안 되는거 그런거 하지말고 로또번호나 알려줘"

<나눔 로또>사이트에 접속해서 326회 복권 번호를 일러준다. 잘 나오지 않는 볼펜으로 숫자 밑에 밑줄을 그어가며 고스방은 번호를 확인한다. 에이 씨발, 또 안 됐네. 그것 참 야속시리 안 되네. 참 야속하네 ...그것 참.

문득, 야속이란 단어가 여기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야속한 님, 로또!

고스방은 300회부터 329회까지의 당첨 번호를 일일히 백지에 옮겨 적는다. 나는 그걸로 자주 나온 번호가 무엇인가 분석하고, 또 다른 나름의 당첨번호 루트를 물색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라고 여겼다. 불러 준 회차와 번호를 백지에 옮겨 적은 고스방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종이를 책상에 놓고는 그 위에 볼펜을 뚜루루 굴렸다.

 

볼펜이 319회 번호 위에 멈춰섰다.

"다음엔 이 번호를 한번 써봐야겠어"

"헉 @#$%^& 이건 또 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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