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간으로 시집 온지 14년째 접어 든다
팔십년도 마지막년 정월 스무이튿날 시집을 왔으니.
내가 황간으로 시집을 오게 된 연유도 알고보믄 거름지고 친구따라 강남 간 꼴이니, 새 인생을 시작하는 이유치고는 참말로 보잘 것 없고 덜 떨어진 일이리라.
고등학교 동기동창 동무는 삼년 내내 RCY활동을 하면서 눈만 뜨만 만나서 붙어 지내고, 방학이라도 뭔 구실을 만들어서 사흘들어 만나 대구 중앙파출소 옆에 있는 청소년 회관에 드나들면서 탁구를 배우네, 공부를 하네,교동시장에서 부침개와 순대를 사 먹네 하면서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온갖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쌍팔년도 크리스마스 다음날 덜컥 황간이란, 듣도 보도 못한 촌동네로 시집을 간다기에 우린 어머머머...했다. 졸창지간에 당한 일이라 그 남편 되는 사람도 못내 궁금했지만, 친구가 처한 가정사며 여러가지 일들을 미루어 그녀의 심경이 결혼 아니면 안되겠다는 결론이였구나 하고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말뿐이였다
대구 팔달시장 못미처 금성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지를 경주로 잡았는데, 대구역까지 우리가 마중을 갔다
시간이 되어 배웅하고 나와서는 집으로 갈려고 기차 레일을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오는데, 어랍쇼? 저 아래 내 친구와 방금 결혼한 신랑이 같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나는 까치발을 하고 육교 난간에 팔을 기대고 그들을 바라 보았는데, 맞선보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해서인지 둘의 모습은 참말로 낯설었다
결혼을 서두른 까닭에 두사람다 충분한 정이 생기기 이전이여서 그런지 한 사람은 서울방면으로, 한 사람은 부산 방면으로 고개를 빼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기차가 들어오는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저 애가 과연 황간이란 곳에 가서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저으기 걱정을 하였다
그 후, 내가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는 그 친구 집에 가끔 놀러를 갔다
기차를 타고가면 그 새댁친구가 반갑게 마중을 나와 주었고, 시어머니나 신랑 되는 사람은 그럴 수 없이 좋아서, 친구의 얼굴이 하냥 행복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드나들다가 친구의 시어머니깨서 나를 당신의 친정 조카에게 선을 보이셨는데, 그가 바로 그 악명높은 고스방이다.
뭐 결혼이야기는 예전에도 한 적 있으니 고만 하고.
결혼에서 젤 신기한 것이 장날 풍경이다
이곳 황간은 지금은 영동군 황간면으로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황간현으로 영동보다 황간이 더 큰 고을이였다
교통사정 역시 영동보다 황간이 더 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어 있어,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로 가는 길이 사방 열려있다.
첨에는 시어머니와 같이 오일장을 보러갔다
어머님 앞세우고, 나는 뒤에 조신허니 졸졸 따라가는.
바지를 첨에는 입지 못하니, 노상 홈드레스라나 뭐 그런걸 입고 지냈는데, 하루는 시장을 가더니 어머님께서 월남치매를 하나 사 주신다.
무릎 길이에서 조금 내려오는 치마가 보시기에 음청 불편하셨나보다
허기사 부엌이란 것이 일미터 조금 못미치게 마루보다 움품 꺼져 있어서
하루에도 양말을 서너켤레나 벗어 내었으니.
그 때부터 내 패션은 월남치매에다 쉐타를 입고 어머님과 장거리를 드나들었다. 금상교 다리를 지나갈라치면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어대는지 치맛자락이 만파장 펄럭거렸고, 내복에다 고쟁이 바지까지 겹쳐입어도 왜그리 춥던지. 내도 대구에서 한다하는 추위 속에 스커트 차림으로 직장을 다니고 했는데, 그 때는 그리 춥지 않던것이 여기는 그렇게 껴 입어도 어찌나 추운지 장날 시장 봐서 동태며 물미역 두어오래기 사서 들고 오면 볼따구니가 시퍼렇게 얼어 모가지에 소름이 파르르 돋아 참말로 불쌍한 몰골을 하였다.
지금은 예전처럼 춥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 때는 왜 그리 추웠을꼬...
가만히 생각하니, 아모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시집을 와 시부모님하고 같이 시집 살이를 하려니 그냥 마음이 추웠던 것이다
살림도 서툴고, 먹는 것도 친정살이처럼 덤퍽덤퍽 먹지 못하고, 선보고 한달 십팔일 만에 결혼을 했으니, 밤마다 끌어 안고 잔다지만 서방도 낯설고, 그래서 추웠던게지. 늦은밤, 군불 때 놓은 아랫목에 배 붙이고 누웠으면 우찌 그리 와락와락 그리움이 밀려오던지. 남행열차는 집 앞 건널목에 땡,땡,땡, 소리를 내가며 수시로 들락이는데, 꼼짝 없이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이 외떨어진 곳에 홀로 동그마니 있구나 하는 생각들이 눈가에 눈물로 고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이젠 뭐 어머님 앞에서 비스듬히 눕기도 하는 편안이 찾아 들어, 변모한 집구석 만큼이나 나도 간뎅이기 부어터졌는데 문득, 어데서 <오일장>이란 낱말만 봐도 울대가 울컥하는 것은.....
다~~~아, 못난 여편네의 못난 시절 되새김이러라.
팔십년도 마지막년 정월 스무이튿날 시집을 왔으니.
내가 황간으로 시집을 오게 된 연유도 알고보믄 거름지고 친구따라 강남 간 꼴이니, 새 인생을 시작하는 이유치고는 참말로 보잘 것 없고 덜 떨어진 일이리라.
고등학교 동기동창 동무는 삼년 내내 RCY활동을 하면서 눈만 뜨만 만나서 붙어 지내고, 방학이라도 뭔 구실을 만들어서 사흘들어 만나 대구 중앙파출소 옆에 있는 청소년 회관에 드나들면서 탁구를 배우네, 공부를 하네,교동시장에서 부침개와 순대를 사 먹네 하면서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온갖 자유로운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 친구가 쌍팔년도 크리스마스 다음날 덜컥 황간이란, 듣도 보도 못한 촌동네로 시집을 간다기에 우린 어머머머...했다. 졸창지간에 당한 일이라 그 남편 되는 사람도 못내 궁금했지만, 친구가 처한 가정사며 여러가지 일들을 미루어 그녀의 심경이 결혼 아니면 안되겠다는 결론이였구나 하고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말뿐이였다
대구 팔달시장 못미처 금성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지를 경주로 잡았는데, 대구역까지 우리가 마중을 갔다
시간이 되어 배웅하고 나와서는 집으로 갈려고 기차 레일을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오는데, 어랍쇼? 저 아래 내 친구와 방금 결혼한 신랑이 같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나는 까치발을 하고 육교 난간에 팔을 기대고 그들을 바라 보았는데, 맞선보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해서인지 둘의 모습은 참말로 낯설었다
결혼을 서두른 까닭에 두사람다 충분한 정이 생기기 이전이여서 그런지 한 사람은 서울방면으로, 한 사람은 부산 방면으로 고개를 빼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기차가 들어오는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아서인지, 저 애가 과연 황간이란 곳에 가서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저으기 걱정을 하였다
그 후, 내가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는 그 친구 집에 가끔 놀러를 갔다
기차를 타고가면 그 새댁친구가 반갑게 마중을 나와 주었고, 시어머니나 신랑 되는 사람은 그럴 수 없이 좋아서, 친구의 얼굴이 하냥 행복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드나들다가 친구의 시어머니깨서 나를 당신의 친정 조카에게 선을 보이셨는데, 그가 바로 그 악명높은 고스방이다.
뭐 결혼이야기는 예전에도 한 적 있으니 고만 하고.
결혼에서 젤 신기한 것이 장날 풍경이다
이곳 황간은 지금은 영동군 황간면으로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황간현으로 영동보다 황간이 더 큰 고을이였다
교통사정 역시 영동보다 황간이 더 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어 있어,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로 가는 길이 사방 열려있다.
첨에는 시어머니와 같이 오일장을 보러갔다
어머님 앞세우고, 나는 뒤에 조신허니 졸졸 따라가는.
바지를 첨에는 입지 못하니, 노상 홈드레스라나 뭐 그런걸 입고 지냈는데, 하루는 시장을 가더니 어머님께서 월남치매를 하나 사 주신다.
무릎 길이에서 조금 내려오는 치마가 보시기에 음청 불편하셨나보다
허기사 부엌이란 것이 일미터 조금 못미치게 마루보다 움품 꺼져 있어서
하루에도 양말을 서너켤레나 벗어 내었으니.
그 때부터 내 패션은 월남치매에다 쉐타를 입고 어머님과 장거리를 드나들었다. 금상교 다리를 지나갈라치면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어대는지 치맛자락이 만파장 펄럭거렸고, 내복에다 고쟁이 바지까지 겹쳐입어도 왜그리 춥던지. 내도 대구에서 한다하는 추위 속에 스커트 차림으로 직장을 다니고 했는데, 그 때는 그리 춥지 않던것이 여기는 그렇게 껴 입어도 어찌나 추운지 장날 시장 봐서 동태며 물미역 두어오래기 사서 들고 오면 볼따구니가 시퍼렇게 얼어 모가지에 소름이 파르르 돋아 참말로 불쌍한 몰골을 하였다.
지금은 예전처럼 춥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 때는 왜 그리 추웠을꼬...
가만히 생각하니, 아모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시집을 와 시부모님하고 같이 시집 살이를 하려니 그냥 마음이 추웠던 것이다
살림도 서툴고, 먹는 것도 친정살이처럼 덤퍽덤퍽 먹지 못하고, 선보고 한달 십팔일 만에 결혼을 했으니, 밤마다 끌어 안고 잔다지만 서방도 낯설고, 그래서 추웠던게지. 늦은밤, 군불 때 놓은 아랫목에 배 붙이고 누웠으면 우찌 그리 와락와락 그리움이 밀려오던지. 남행열차는 집 앞 건널목에 땡,땡,땡, 소리를 내가며 수시로 들락이는데, 꼼짝 없이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이 외떨어진 곳에 홀로 동그마니 있구나 하는 생각들이 눈가에 눈물로 고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이젠 뭐 어머님 앞에서 비스듬히 눕기도 하는 편안이 찾아 들어, 변모한 집구석 만큼이나 나도 간뎅이기 부어터졌는데 문득, 어데서 <오일장>이란 낱말만 봐도 울대가 울컥하는 것은.....
다~~~아, 못난 여편네의 못난 시절 되새김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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