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몽블랑 만년필

황금횃대 2005. 9. 28. 19:02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만 피는 것이 아니고

붉디 붉은 이내 마음 속에도 꽃들이 핀다.

예전처럼 대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캐는 아낙은 아닐지라도

씽크대 제일 높은 곳에 얌전하게 엎어져 있는 대바구니가 무답시 눈안에 들어 오고

못 쓰는 과도라도 발견하게 될라치면 나물캐러 가는 날을 기약하며 칼갈이에 낑가넣어

문득 날도 세워 벼려 보는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은 빛살만큼이나 환하게 마음이 밝아져서

혹시 씨잘대기 없는 성령이 임하였나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리는 만무하고.

이왕 마음이 환해졌으니 방구석 청소나 함 해볼까?

문갑을 다 뒤집고, 재봉틀도 자리를 옮기고, 아이들 방의 텔레비전을 우리방을 옮겨놓고

그렇게 뒤지는데 문갑 여닫지 수납 젤 구석쪽에 뭐가 눈에 띈다.

아니, 이게 뭐야 잉크잖아

<파카 리얼블랙 잉크>

이, 이, 이게 아직도 여기 있다니.

파카 리얼블랙 잉크의 전설은 뭐 짜다라 으시시하지도 않고

추억의 긴 머리카락을 산발하며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렇지, 그렇지, 그런 시절 딱 한 번 있어네...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러니까 십칠년 전, 결혼을 마악 한 때가 음력으로 섣달 보름이였으니, 보름 간신히 지나자

설이 되었다.

시집 오고 첨 맞는 설이란게 친정집하고는 많이 달라서

초보의 어설픈 손 놀림은 그야말로 실수 투성이였는데

어쨌던 그럭저럭 보내고 또 이랫날이 지나자 내 생일이 돌아왔다

새신랑 고스방은 생일 선물이란걸 평생 모르고 살았다가

각시가 생겼으니 기분이 거쉬기 했는가 생일 선물을 사 준다고 한다.

늦은 밤에 영동 시장통에 가서는 뭘 가지고 싶냐고 물어 본다.

<만년필>과 <책>

나는 이 두가지를 말했고, 허접한 문방구에서 케케 먼지를 뒤집어 써고 있던

빠이롯드 만년필 한 자루를 허겁지겁 닦아 주던 손길을 빤히 쳐다보며 샀었다.

그리고 서점으로 가서는 고른다는게

<현대 문학> 1월호,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증언> 두 권이였다

내가 그 책을 고른 의도는

얌마, 현대문학이란 책은 계속 받아 보는 책이니까 알아서 정기 구독 좀 해주면 좋겠어..하는 뜻

과, 내 츠자적 독서 취향은 주로 이런 것이야 하고 고른 책이 쇼스....이다.

그런데, 고스방은 저런 두 가지 취지 중에 한 가지도 여태 살면서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덴장.

그 때 산 새 만년필에 시집 오면서 가지고 온 파카잉크를 넣으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결혼 선물로 내 동생이 사준 대학노트 세 권에다 일기를 쓰면서

나는 또 얼마나 좌절했던가

잉크는 아직도 바닥에 찰랑이는 액체를 담고 고요히 가라 앉아 있다

만년필 잉크 주머니를 북작거려 잉크를 넣고 나면

잉크병의 잉크는 한 번씩 요동을 치지만

나머지 시간은 저 홀로 조용히 가라 앉아 시간을 기다린다.


그 때의 만년필은 지금 어디 갔는지 찾을 길이 없지만,

나는 또 한 번 꿈을 꾸는 것이다.

만년필 하나 장만해서 또 써 보는거야


하고.

(2005. 3. 9)

 

 

 

지난 3월달에 이런 글을 블로그 귀튕이에다 썼었다.

먼데 말레지아 암팡에 사시는 양반이 이 글을 기억하고, 오늘 아침에 귀국했다며 댓바람에 차를 몰고 황간까지 와서 만년필을 건네준다

 

나로서는 걍 빠이롯드 정도만 되도 워낙 글씨체가 쥑이주니까 명필은 붓 안가린다고 참 잘 쓸건데, 몽블랑 씩이나 준비해서 갖다준다

 

이렇게 나는 쓰다만 잉크병 찾아냈다고 뻥튀겨 한 자 썼다가, 귀한 선물을 받았다.

(말은 이렇게 한다만, 사람이 말 한마디 내뱉어 놓으면 그놈이 천금같은 무게로 세상을 돌아댕기는지 실감을 하다)

 

 

어이고, 이걸로 책을 내게 되면 계약서에다 화라락 내 사인이나 머뜨러지게 해 볼까?

 

(꿈도 야무지셔^^)

 

 

 





횃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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