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또 다시 봄 오는 길목

황금횃대 2004. 4. 12. 17:14
일전, 남편의 친구와 늙수구레한 얼굴이 둥근 형상을 한 노인네가 같이 와서
자두 나무 전지를 하였다
작년 비끝이 너무 길어서 나무가 많이 상하였다. 그래도 못생긴 가지며 모양없이
뻗은 가지에 자잘한 가지, 개구리가지, 우산발처럼 정신없이 생겨먹은 가지들을
눈에 띄는대로 전정작업을 하였다
하루를 꼬박 새참에 점심 해다 나르느라고 다리품을 팔았다
밭으로 가는 길이 녹아 질척인다.
아직은 이르지만, 조금 있으면 이 길은 제비꽃방가로가 생겨난다
봄이면 '제비꽃 여인숙' 임시간판을 내걸고, 보라색의 고운 꽃을 피우는
방가로 길이 된다. 그 때가 되면 나는 불륜의 여편네처럼 여인숙 사잇길을
휘파람을 불며 걸어 갈 것이다. 어느 놈팽이를 찾아 나선 바람난 여편네처럼


밭 가득 잔가지와 큰 등걸이 작년에 나온 새순을 회초리처럼 몸에 매달고
널부러져있다. 시내가서 잘 드는 낫을 사왔다. 첫날 하루 낡은 낫을 가지고
갔었는데 이놈의 낫이 사람덕을 볼라고 녹슨 날을 싸악 들이민다
종일 손목아지가 아프게 낫질을 하며 나무가쟁이와 씨름을 하다
이불보통이 만한 나뭇짐 스무남개 해 놓으니 덧 정이 없다.


낫 한자루, 날이 제법 대장간에서 벼루었음직한 냄새가 나는 걸로 사다
만원이란다. 낫 한자루 만원을 해도 일하는데 수월하다면 돈이 아깝지 않다
사람이 힘으로도 일을 하지만 연장이 반몫은 하는 것이니까

낫자루를 불끈 움켜쥐고 힘있게 큰 등걸에 붙은 곁가지를 쳐낸다
날카로운 단면을 만들며 가지들이 떨어져나온다. 가지런히 주워 갖가지 크기의
나뭇단을 만든다

촌구석에 살면서 끼니 끓여먹는거야 가스불로 한다지만, 가끔은 장작도 필요한
일들이 언듯번듯 나서는지라 저번에 말했듯이 집구석에 땔나무 하나도 마련하지
못하고 사는 일도 여간 옹색스런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자두나무 전지한 것을 모두 깡총하게 묶어서 집 담벼락 아래 쌓아두고
불 때서 할 수 있는 일은 착실히 불을 지펴 볼 생각이다
어젯밤 가스가 떨어져 아침에 두통을 주문했는데 한통에 이만이천원씩 사만사천원을
지불하고 나니 누가 훔쳐간 듯 지갑이 텅 비었다.
작은 드럼통 아궁이를 하나 장만해다가 오래 끓이는 것은 나무를 때서 해볼 참이다.
사람이 살아가매 나날이 편해도 얼굴빛은 늙어 쪼그라질것인데, 불까지 때자면
시남시남 귀찮기는 하겟지. 그러나 그것도 옛 추억의 재현이라 생각하고...

오늘 한 번만 더 밭에 걸음하면 어지간히 다 주워 묶을 수 있으리라
아들놈은 같이 가자니 두어번 따라가더니만 힘들고 허리 아프고 재미없는 일이라
오늘 아침에는 깨워도 자는 척하며 돌아보지 않는다.
그럼 뭐 혼자 가서 하지

봄이 오는 너른 들판에는 뭐 먹을거 있나 싶어 까마귀가 불경한 울음을 내지르며
전신주와 하늘을 오가며 화르륵 날개짓이다. 봄이 주는 무게는 얼마나 맑고 경쾌한지
둘러 보는 눈이 구질구질함을 못 참은 법이다.
철로변에 억새도 생각같아서는 불을 질러 새까맣게 태워놓고 싶은데 봄 불은 여우불이라 눈에는 뵈지 않고 퍼져 나가기는 삽시간이니 함부로 불을 놓지도 못한다

지난 겨울 김장배추 갈아 먹은 땅에 깔린 검은 비닐도 걷어내고, 밭둑가에 쳐놓은
흰 노끈도 거둬서 처대야하는데 바람은 시나브로 불어 쌓고, 혼자서는 불 감당을 할 수가 없으니 마음 구석 찝집하여도 그냥 바라볼 밖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경부열차의 마찰음이 골짝밭의 무료함을 잠시잠시 깨어놓는다
그 틈에 기차를 한 번 바라보며 장갑 벗고 쓴 입에다 물 한 모금 따뤄 넣는다
울대가 끄덕거리며 물 넘어가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달고 시원하다.

촌여편네에게 봄이 온다 함은, 어이구....이 소리만 수시로 뱉게 하는 근심이다.




전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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