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여자상업고등학교의 삼학년 교실은 하나씩 둘씩 빠져 나가는 친구들
의 빈자리에서 바람이 숭숭 일었다.
순위고사가 치뤄지고, 고만고만한 얼굴과 고민들을 품어 안은 여고 삼년
의 꿈들이 하나 둘 가슴에 알록달록 풍선을 달고 취업전선으로 나갔다
비어가는 교실의 한 모퉁이에는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몇몇의 웅크린 어깨가 보이고, 쓰레기와 쌓인 먼지들이 움직일 때마다 먼지를 풍풍 토해내는 교실의 뒤켠에는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림과 까르르 웃음이 포대째로 쏟아졌다.
"순자하고 영아하고 또 누구는 어느 은행으로 간데”
“그래, 이번에는 어디서 추천장이 들어왔다 카더노?”
일반상식 책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반쯤의 귀는 친구들 두런대는 소리에 보내 놓고, 반쯤의 눈은 책 위에 머물러 웅얼웅얼 유령처럼 상식을 웅얼거렸다.
수업이 시작 되어도, 군데군데 비어버린 자리만큼이나 맥 빠진 수업이 되기 일쑤였는데
그 중에서도 담임 선생님이시던 김준표 선생님의 수학시간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수업시간에 장기 자랑이라든지, 아님 노래자랑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노래를 못했기에 장난으로라도 추천 받는 일이 드물었다.
친구들은 나가서 노래를 잘도 불렀는데,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이 자신도 없었거니와 음정도 맞지 않고 박자 감각도 헤매기 일쑤여서 그저 노래 잘 하는 친구들을 입 딱 벌리고 바보같이 헤~~~쳐다 보기만 했던 것이다.
하루는 방학도 다 되어가고 집에서 반짝이로 무대장식까지 만들어 가서는 오락시간을 가졌다.
선생님의 십팔번, 새까만 눈동자의 아가씨, 얼굴만 이쁘다고 여자냐.. 노래가 끝나자 환호가 이어지고 다음 타자로 성자가 지목되었다.
성자는 나와서 대뜸 ‘님을 위한 노래’라는 가수 오정선의 노래를 불렀는데, 우리는 그 노래를 듣고 선생님이 띄워 놓은 분위기를 일순간에 가라앉히며 노래에 빠져들었다
어두운 벼랑 위에
찬이슬 맞으며
동백꽃처럼 타다가
떨어진 꽃이될까
가신님 무덤가에
쓸쓸히 나 홀로 피어서
외로움 달래주는
한 송이 꽃이 될까
석양이 피어나는 하늘에
우리님 그리며
외로움 달래주는
한 송이 꽃이 될까
내가 꽃이 되고
산새가 날아오면
우리님 사랑도
넋살아 꽃이 될까
외로운 산 속에
홀로 누운 님을 두고
돌아서 오는 길엔
찬비만 내리네
보낸 님도 없었건만, 우린 열병처럼 이 노래를 배우고 불러대었다.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노래를 외우며 불렀으니 지금 생각하면 노래에 진취적 기상이나 마음을 곧추 세워줄 가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단지, 딱 한가지 취업걱정만 하면 되는 철없는 시절에, 슬프고 애절한 모습을 노래가사에서 발견하고 대리만족을 했을지도 모를 일
이제는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 여고시절
맘에 드는 노래가 있어도 ‘배워야지’ 하는 야무진 희망도 없이 그저 귓가로 흘려버리기만 하는 불혹의 나이인데, 그 때 배운 이 노래는 평생을 가도 아마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래 전에 어디서 잃어버린지도 모르는 꿈을 이 노래서 찾아 낼 수 있는 것은 노래의 가사가 주는 의미보다, 그 당시 꿈 많고, 무엇이든 손대면 이룰 것 같았던 마이다스의 손 같은 황금의 시절에 내 가슴에 처연히 녹아든 노래이기 때문이리라.
내 나이 마흔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내 안을 무엇으로 채우려는 욕심보다는 저 어두운 벼랑 끝에서 한 줌 흙이나 재로 돌아갈 날을 위해 서서히 자신을 비워내는 훈련을 시작 할 때이다.
나와 가족을 위한 삶에서 더 나아가 여태까지 채우고 모은 것들을 나눠 주면서 살아도 되는 나이가 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그리하면 살면서 잃어버린 꿈들이 내 안에서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더불어 사는 삶의 꿈!
'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율배반 (0) | 2004.06.02 |
---|---|
살아가는 이야기 1 (0) | 2004.05.21 |
바람의 응원 (0) | 2004.05.18 |
포도를 빚는 일 (0) | 2004.05.17 |
울컥하는 마음 (0) | 2004.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