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렇게 제목에다 "살어낸 이야기"라고 적어 볼 때
어디서 이런 지청구 한 페이지쯤 날아 오는거 같어요.
"저누무 여편네는 맨날 저만 살아내느라고 바쁘지..."하는.
포도순이 나기 시작하면서 포도농사꾼의 인생이 시작되었습죠
날마다 포도밭을 오르내리며 찔레공주가 무더기로 피어나는것을 보고,
잠깐 앉아 쉬는 나무 파레트 위에 아카시아 꽃이 툭,툭, 홀애비 어깨에
이 떨어지듯 떨어지면 나는 갑자기 생각이 깊어져요.
생각이 깊어져도 그것으로 끝날 뿐, 마음은
아이고 저놈의 밭고랑 언제 끝이나나.....일렬로 정렬되어 있는 포도나무만
줄창 헤아려보고 있습죠. 월래는 기장 위가 월래이지만, 원래 일 못하는 놈이
밭고랑 수만 헤아리고 있다는 속담도 있지만 내가 꼭 그 짝이래요.
어제는 시할머니 제사였지요. 아시다시피 동서가 직장을 가지는 바람에
혼자서 종일 제수음식 장만하느라고 발바닥에 열이납니다.
첫새벽에 제사를 지내고 치우고 잤는데 다섯시에 또 깨워요. 고스방이 오늘
괴산에서 체육대회가 있다고 일찍 가야한다고 말했더니 어머님이 다섯시부터
깨우십니다. 아...깨우면 아들내미인 고스방을 깨우지 왜 날 깨워서 당신
아들을 깨우라고 얘길 하시는지...갑자기 화가 파악 치솟았어요. 거기다가
대구에서 온 큰집 아즈버님과 조카가 일찍 간다고 그 때부터 아침밥상을
차리기 시작해서 고스방, 아버님, 어머님, 작은집 조카놈, 울 아들, 또
정거장에 사시는 시고모내외분..까지 밥상에 과일까지 내오고, 제기 닦아서
통에 담아놓고, 상이며 그릇이며 접시며...다 닦아서 넣고 부엌바닥 청소하니
딱 열시입니다. 물 한병 챙기고 모자에 수건 챙겨서 포도밭에 일하러 갈라니
갑자기 억장이 무너져요. 왜 그럴 때가 있잖아요. 일이 죽어라 하기 싫을 때.
냅다 오토바이를 타고 어머님한테는 밭에 간다고 하고서는 대구가는 기차를 타고
친정에 갔습니다. 친정엄마는 계모임에 가시고 아버지 혼자서 옥상에 페인트칠을
하시다가 내려오시네요. 올케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그냥 빈둥빈둥 놀았지요
넌출대는 포도순이야 걱정이지만, 그거 하루일 미뤄놓아봐야 누가 해 줄리 만무
하고 결국 내가 쌔가 빠지게 해야하지만 하루 아무 노동없이 놀았다는게 번.듯.한
위안이 될 때도 있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계모임 가신 엄마는 오지 않고 오후 네시반 출발하는 기차표를
예약해서는 역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내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우니
버스를 기다리는 아줌마의 푸른 핏줄이 드러난 종아리도 슬프고, 멋진 청바지를
입고 엉덩이 호주머니에 꽂아 놓은 핸드폰 줄에 매달린 아기돼지도 슬프고..뭐
그런거 있지요, 그 시간에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중학생 아이들의 하얀제복이
슬프고...그들이 손짓발짓하며 표현하는 그들만의 언어들이 너무나 아득하여
슬프고..오호라 바야흐로 세상은 온통 우울과 슬픔뿐입니다 그려.
아침에 제사상을 치우면서 엄마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더랬지요
그래서 만사 제쳐놓고 수박 한 덩이 을러매고 들른 친정집.
이 나이에도 엄마가 없으면 허전한가요? 참내...아기가 따로 없습니다.
황간에 도착한 기차에서 발을 내딛여 내가 사는 곳의 땅을 밟습니다
하루종일 땡땡이 친게 미안하여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포도밭으로 가서
포도순 한 골을 잡아 부지런히 순을 떼나갑니다.
여전히 산골에는 작은 새들이 바쁘게 날고, 아카시아 꽃이 떨어지고, 찔레가 피고
나무잎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산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한 것부터 큰 것까지
정해놓은 순서없이 귓바퀴에 머물렀다 떠나고 나의 머리속은 다툼없이 그것들을
받아 들였다가 내어놓았다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게지요. 살면서 한 번쯤 멀쩡한 세상에다 투정을 부려보는게지요
깊고 깊은 심연의 아가리에 제 대가리를 푸욱 담궜다가, 푸르르 머리카락을 흔들어
가며 요란스럽게 우울을 떨쳐보기도 하는거지요. 다아...제 변덕입니다
그러기나말기나 뻐꾸기는 무심으로 울고, 소리개는 고공비행을 합니다 그려
에게게..고작 이게 살어낸 이야기냐구요?
대개 나같은 소시민은 사소한 것을 떠벌려 뻥튀기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메렁..
늘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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