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이들 방학하고 집에 오자마자 혼자 살살 꾸려놓았던 행장을 손에 쥐어주며
"우리 떠나자!"했다
아이들 보다 어마이가 더 방학을 기다리며 튈 생각을 하고 사니 어쩌나.
그러나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세상의 일은 <아! 다행이다>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
그러니까 괴나리봇짐을 이 장마통에 울러매고 친정을 가더라도 괘안타는 이야기다
삼일연휴가 시작되는 관계로 대구로 가는 열차는 그야말로 만원이다.
미리 예약해 둔 표를 찾아 각자 좌석으로 찢어져 앉아 간다.
가는 도중 비가 시작된다.
모들이 자라는 파란 들판에 빗줄기가 바람과 같이 와아~하고 쏟아진다.
저 비가 강원도 인제 원통 쪽으로는 막강힌 피해를 입히고 있단다.
수박 한 통 사들고 친정집에 도착하니 엄마 아부지 큰동생 식구들이 반갑다고 나온다
대구는 비는 내리지 않는데 꿉꿉하고 덥다
봇짐 풀어놓고 오랜만에 저녁 먹으로 근처 식당으로 대부대(10식구)가 걸어서 가는데
비가 쏟아진다.
갈비를 구워먹으며 아이들과 신이 났다.
언제나 우리 식구에게 참 잘 해주는 동생내외가 너무 고맙다
옛날 큰 동생 군대 갔을 땐, 파주 적성까지 내가 참 부지런히 면회를 갔었다
울 엄마는 아들 셋 군대에 보내놓고도 한 번도 면회를 안 갔다
저녁먹고 집으로 와 제천 갈려고 한 약속이 생각나 교통상황을 보니 영 아니다
제천 쪽으로 물폭탄이 투하중이란다
내 생각같아서는 그 까잇꺼 나서면 또 아무리 쏟아져도 갈터인데 아부지가 극구 말린다
길이 저런데 어딜간단 말이고
결국 아버지 말씀을 듣기로 하고 전화를 하니 하루종일 기다린 사람들은 오라고 그런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보고 가능하면 갈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상황이라는게 좋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기만 한다
하루종일 장마재난방송을 들으며 집 안에서 서성거린다
대구오면 아이들 떼놓고 내 볼일 보러 나가기 바빴는데 딸래미가 아프고 난 뒤에는
이제 딸과 같이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백화점에 올케랑 딸이랑 같이가서 수표한장 박살내여 찌지부리한 바겐세일 옷들을 산다
올케가
"이제 상민이가 뭐 해달라는건 무조건 오케이예요? ㅎㅎ"하고 웃는다
좀 있으면 제동이 걸리겠지만 지금으로 봐선 좀 그런편이라고 응수한다
저번에 서울 갔을 때도 티셔츠가 제 맘에는 꼭 드는데 삼만오천이라는 금액에 고만 한 걸음
물러서더니 서울서 집에 올 때까지 그 옷이 눈에 밟히더라나
그러더니 이번에는 이만원 미만의 옷들이여서 그런가 제 맘에 드는 옷을 주저않고 산다
동생놈 반바지도 하나 사고, 나도 바지를 두 벌 사고.
바지는 사면 딸하고 규격이 비슷하니 같이 입을 수 있고
하여간 고스방은 돈벌이가 어렵다고 징징 짤아도 여편네와 딸은 이것저것 주워담는 재미에
눈가에 실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에고..
그렇게 하루를 친정에서 자고 고스방이 돌아오라는 날이 밝았다.
비는 종일 장대비로 쏟아지고 어디 볼 일 보러가는 일도 비때문에 주저주저 종일 집안에서
뭉그적거리는데 저녁 표를 예약 해놓고 앉았으니 비가 더 쏟아진다
갈려고 보퉁이 싸 놓고는 시간만 기다리는데 비는 더 쏟아지고 그러니까 아부지께서
"비가 많이 오는데 고만 내일가그라"
"저녁에 오랬는데 하루 더 자믄 또 뭐라할까바 그러지요"
"고스방한테 전화 걸어봐라 내가 얘기해주꾸마"
우히히히히
그자리에서 전화 번호 돌려 나는 여보세요 소리도 안 하고 아버지께 전화기 넘겨주니
"고스방인가. 내다. 잘 지냈능가. 내가 고실이보고 퍼뜩 집에가라고 아까는 이야기 했는데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가겠다. 하루 더 자라쿠고 내일 보내주꾸마"
천하에 고스방도 어쩌긋어 장인이 직접 전화해서 딸래미를 내일 보내겠다는데.
하룻밤 더 자기로 하고 끌어댕겼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는.
밤 10시쯤 되자 저번에 스키 타러 갈 때 같이 간 이부장 와이프가 생일이래서 대구 방송 뒷편에 있는 막걸리 집으로 오라해서 동생 내외와 그 집 내외 다섯이서 새벽 한 시반까지 술 마셨네
얼라들 이야기, 서방 이야기..오나가나 그런 이야기.
두시 넘어서 자는 바람에 아침 첫차는 또 놓치고, 다음 기차 타고 김천 내려 장보고 집에 오니 열시가 넘었다.
황간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여기도 비가 쏟아지긴 마찬가지
주차장에서 손님 기다리던 고스방이 여편네가 보퉁이 보퉁이 끌어 안고 내리니 집까지 태워준다
차안에서
"장인 어른은 여편네가 뭐시 이쁘다고,비오면 오는 갑다하고 집에 가라하시지 전화를 해설랑..어디 이쁜데가 있노? 내가 보니 미운 구석밖에 없구만."
"모르는 소리, 울 아버지 아침에도 내가 나오는데 가방에 비 맞는다고 골목까지 우산 씌워주시고, 그라고 내 우산이 작아보였는지 당신 우산이 크다고 이걸로 바꿔쓰고 가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걸. 울아부지는 내가 아무리 나이 먹어도 이쁜딸이여 왜이래여"
"이뿌긴 뭐가 이뻐"
어이구, 내중에 자기 딸 상민이가 시집갔다 친정에 오면 비 오는 날 어떡하나 내 두고 볼끼야"
점심 먹고는 아주 늘어지게 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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