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동맹 상순이

슬픈 아침

황금횃대 2008. 6. 5. 08:25

이틀째 날이 흐리다. 비도 뿌린다. 지난 토, 일은 농활한다고 뒤치다꺼리에 일에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농활팀들은 혼신으로 일한다. 맨날 일하는 나도 모가지가 아파서 끙끙인데 첨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저녁에 회관청소를 마치고 쓰레기를 아궁이에 태우면서 결명자물까지 한 솥을 끓여 놓았다. 마지막으로 수돗간에 세수비누통을 챙겨 뒷길 돌아 집으로 올 때는 너무 피곤해서 묵은 피곤이 한 껍데기 벗겨지는 느낌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천년을 살아도 모른다. 왜 상처도 새살이 돋으면 묵은 살은 밀어내며 올라오지 않던가. 피곤도 그러하다. 누대로 묵은 피곤도 극도의 피곤이 새로 생기면 오래된 피곤은 벗겨진다. 이걸 말로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몸으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사람 살이에는 몇 가지가 있다 가령....하고 다른 예를 들어 볼려니 생각이 안 난다.

 

아침에 기차 시간이 급한 상민이가 새로 산 운동화를 찾았다. 일본 여행갈 때 신고 갈 거라고 산 운동화인데 막상 신어보니 운동화 흰빛이 너무 부셔서 <촌년>같다고 다시 벗어놓고는 때가 꼬장꼬장한 발목까지 오는 운동화를 신고 갔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 두었다. 마른 먼지가 연일 풀풀 날리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신발은 신발장 안에서 여전히 뽀얀 얼굴로 먼지를 피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신고 가려고 운동화를 찾으니 없다. 아무리 신발장 속에 신발 종이곽까지 살뜰히 뒤져도 없다. 이것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머리를 통해 망막으로 흘러나오는 영상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다른 신발을 내려고 신발장을 열었을 때 눈부신 흰색으로 떼똥하니 앉아 있던 새 운동화. 그 영상이 머리속에 가득차서 눈으로 흘러 나오니 딴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방에서 윗도리를 다리던 고스방과 등교준비를 하던 아들이 번갈아 나의 걱정을 듣는다. 운동화가 희안하게 없네. 내가 분명히 신발장에 넣어 두었는데....누가 가져간 걸까. <가져가긴 누가 가져가 잘 찾아봐> 아냐, 그게 발이 있어 자가용이 있어 도대체 저 혼자서는 꼼짝도 못하는 것인데 어디갔단 말이야. 이상하네, 희안하네.

머리에 가득 찬 걱정은 이번에는 입으로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윗도리 교복 단추를 채우던 아들놈이 단호하게 한 마디 한다. <나는 엄마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나는 도무지 신발장 안에 신발 밖에 생각이 안 나는걸. 그 이후의 기억은 필름조차 없다는 듯 깨끗하다.

 

콩이 튀는 바쁜 아침에 몇 번을 더 신발장 점검을 한다. 깨끗하게 사라졌다. 며칠 전 아들놈 운동화 깔창을 새로 사서 넣은 것은 기억이 난다. 깔창을 넣은 운동화는 1/2이 새 운동화로 리모델링 되어서 그 자리에 있다. 저것 봐. 쟤네들은 그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잖아.

이제 까탈스런 딸년 몰래 운동화를 하나 새로 사놔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졸지에 삼만구천원을 떡 사먹게 생겼군. 그래도 잔소리 듣는 것보단 삼만구천원 쥐도새도 모르게 지출하는게 낫겠지. 또 한번 딸년 얼굴을 생각하고는 다짐을 한다. 퍼뜩 설거지 해놓고 나가봐야겠어.

 

아이들 방에 들어가 빨래감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책꽂이 못에 노란 종이 가방이 걸려있다. 혹시나 하고 겉면을 찔러보니 뭔가 들어 앉아서 반응하는 느낌이 손가락에 전해진다. 또 한번 혹시나...하고 종이 가방을 내려보니 그 안에 하얀 운동화가 공간이동을 해서 누워있다. 해먹에서 한 숨 잔 표정으로 운동화는 나를 쳐다본다. 찾았다!

<내가 뭐랬어요. 엄마의 기억력은 이제 신뢰 할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아들놈 말에 스방은 한 술 더 뜬다. <언제부터 니 엄마가 저런 증상이 왔느냐>며 엥간하면 머리에 피가 잘 돌게 써큐란을 한 통 사서 먹어 보라고 진지하게 권한다. 슬픈 아침.

 

이러다 나는 집도 못 찾아 오는게 아닐까, 아이들 얼굴도, 스방 뒷태도 기억이 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중에 내가 나인 것도 잊어 먹으면 어떻하지...설거지도 미룬채 나는 여기다 나를 기록해 놓고 훗날 나를 기억하려는데...또 다시 슬.픈.아.침.

 

슬픔 아침 뒤통수에다 효자 아들놈이 위로랍시고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 이제 그럴 나이가 됐어요 슬퍼하지 마세욤!>

이런 제길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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