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 가면 일할게 줄나래비를 섰는데도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것은 멀어져가는 파노라마 화면같이 눈 앞에서 사라질 수 있다
오늘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는 <20세기로의 여행- 피카소에서 백남준으로> 전시회를 보러갔다
밭에 간다고 츄리닝 몸빼바지에 후줄구리 면티셔츠 입고 냅다 포도밭에 간다하고는 서울로 날랐다
불륜의 꿀맛이라더니, 땡땡이의 몰핀맛은 맛보지 않는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모를 맛이다.
대충 영동역 화장실에서 청치마와 후드티로 갈아입고 화장실을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농땡이고딩이 된 느낌이다. 실제 상고 다닐 때야 이런 일 상상도 안 하고 컷는데, 정작 나이 마흔셋이나 묵어서는 그러구 다니는 것이다. 검은 안경을 미처 챙겨오지 않아서 그렇지 기차 타고 가면서 들을 미니 카셋까지 챙겼다. 바쁜 아침에 저런거 챙기기가 어디 쉬운가.
그렇게 농사꾼 몸빼 복장에서 앞가슴 파악 파인 후드티를 입고 룰루랄라 기차에 올라탄다.
내 옆자리에는 반바지를 입은 총각이 탔는데 가방 가득 신문 스크랩한것을 서울 도착할 때까지 훑어보며 읽고 있었다. 활자중독증 환자인 나는 넘의 것을 기웃거린다. 베라별 신문에서 벼라별 내용이 다 스크랩되어있다. 내 수중에 없으면 왜 그리 그리운가. 신문쪼가리도 내 앞 바구니에 없으니 아숩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숫기가 없어(?) 그거 한쪼가리 다 본거 같이 보자 말을 못했으니.
지난 간송미술관 다녀 온 이래로 다시 온 서울.
여전히 잿빛 하늘에 뜨거운 바람이 불고, 바쁜 사람들의 뒤돌아 볼 것없는 발걸음이며 우뚝 솟은 빌딩들...나는 또 새삼스러워 목을 낮추고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빌딩의 층수를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고 있다. 저걸 세어 무슨 영화를 보것냐마는 습관적이다. 그래서 촌사람 티난다 그러겠지
지하철 타고 한 구간 가니 시청이다. 내려서 덕수궁으로 올라가 근처 메밀국수 집에서 오랜 만에 메밀국수로 요기를 하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2002년인가? 운보 김기창 그림 전시회 할 때 와보고 오늘 갔으니 그것도 만만찮은 시간이 흘렀다.
궁궐의 뜨락에는 촌에서 떨어지는 그 햇살이 비슷한 모양으로 마당에 토닥토닥 떨어진다. 나무 그늘 밑에는 사람들이 더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도심 속의 섬 모양으로 궁궐은 자리 잡고 있다. 고색 창연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그냥 모형의 집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건물의 배경이 초현대식이니 궁궐만 동그마니 있는 그것이 무슨 옛것의 맛을 풍기겠는가.
미술관 안에 들어가니 시원하다.
호텔커피숖에서 쥬스 한 잔 마시면 부가세 포함 9000원쯤의 돈을 지불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으로 표를 끊고는 그림을 둘러 본다. 1,2,3,4 전시관에 유명한 작품들이 걸려있다. 나야 뭐 그림에 대해 보는 눈이 전무한지라, 도대체 저렇게 두껍게 물감칠을 하자면 어떻게 찍어 붙였을까? 아님 그림의 재료에 대해 작은 설명만 눙깔을 들이대고 봤다.
카렐 아펠의 <소도살>이란 그림이 머리에 콱 박혔고, 오수환의 <곡신>이란 그림을 나름대로 의미있게 볼라고 눈을 가로왈 찢어서 보았다.
노상균의 부처의 장갑은 요즘 유행하는 스팽글을 붙여서 부처의 손모양에다 일일이 하나하나 박은 듯이 작업을 했는데, 화강암으로 느끼던 부처의 손과는 또 다른 맛을 전해 준다. 반짝이는 것도 부드럽다. 그것이 무엇을 표현했는가에 따라.. 클래스 올덴버그의 <망치, 톱, 양동이가 있는 거대하고 부드러운 사다리>도 흠..내 마음에 쏙 들었다.
마음에는 밭이 신경쓰이지만, 제법 꼼꼼이 봤다. 기차 시간이 급해서 서둘러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띨레레레 띨렐레레레레...고스방이다.
"야, 아버지 핸드폰 빳데리 하나 더 어디 놔뒀어?"
"헉, 그것이 언제적 이야긴데 지금 찾냐...더듬더듬...그것이 그 때 내가 충전기 사러 갈 때 같이 들고 간 가방 속에 있을거인데 그게 무슨 가방인지 더듬더듬...."
이런, 꼭 이렇게 범생이 티를 낸단말이야.
"아버지 빳때리를 니가 왜 가지고 있어!!!" 아이고 귀 따가와라
"저녁에 집에 가서 찾아 줄게요. 좀 기다리시라 그래요"
"엠병할..지금 빠때리가 다 나가서 필요한데 저녁은 무슨 어러주글"
등때기 식은 땀이 확 난다.
수업 띵가묵고 대도 극장에 <미워도 다시 한번> 보러 갔다가 담날 선생님한테 들켜서 혼 날때의 그 느낌이 시공을 가로질로 그대로 등때기에 꽂힌다.
그 때부터는 그림에 대한 기억도, 옛궁궐에 대한 서늘함도, 분수의 물줄기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초를 다투며 KTX표를 동동 걸음으로 끊어 대전까지 타고 와서는 1분 뒤에 뒤따라 들어오는 무궁화타고 영동으로 왔다. 영동까지 오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 온 누이처럼 마음이 느긋해지는데, 변신 뾰료룡, 화장실 뾰료룡~ 몸빼바지로 변신하라 얍!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도, 쥐새끼 마부도, 유리구두도 없어지고 나는 순식간에 허름한 촌아낙이 되어 밭으로 온다.
하루종일 놀아 재겼는데 양심은 있어가꼬 포도골 한 골 일사천리로 주물락 거리다가 집으로 온다.
변신 복장을 꾸셔넣은 비닐 봉다리 밑바닥에는 20세기로의 여행- 피카소에서 백남준으로 라는 팜플릿이 부채살처럼 접혀 얌전히 있다. ㅎㅎㅎㅎ
저녁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아침에 널어 놓은 빨래를 걷고, 아버님 핸드폰 베터리를 집구석 홀랑 뒤집어 놓으면서 기어이 찾아낸다. 얌전히 아버님 방에 갖다놓고는 혼자 퍼대지고 앉아 긴장이 사라진 몸이 어떻게 허물어지는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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