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포집 세째며느리

술 한 잔

황금횃대 2006. 10. 5. 00:21

며칠 전부터 포도일 끝내고는 술 한 잔 하고 싶었지

내가 술을 먹을 줄 모른다면 모를까 그걸 맛있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인데 그 한 잔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란 쉽지가 않지를. 마음은 굴뚝같은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게다. 그리고 술 먹을 짬이 없더라구

고스방은 다리를 다쳐 저렇게 시퍼렇게 돌뎅이같은 다리를 만들어서 드러누워 있는데 혼자 딸랑 나가서 한 잔 하고 오기란 참말로 쉽지 않았지.

 

아침나절에는 명절 쇤다고 마당이며 구석자리에 뒷마당까지 감잎사구 떨어진걸 씰어서 태우고, 군데군데 짱박혀서 처박혀 있던 비닐 봉다리 같은거 다 쑤셔내서는 그것도 처리하고 말갛게 쓸여낸 마당을 아랫채 댓돌 위에 앉아서 넋놓고 치어다보고 있을라니까 탁걸리 한 잔이 지절로 생각이 나는거라

그래도 뭐 그걸 먹고 싶다고 먹을수가 있깐? 꾹 참았지를.

 

서방인지 남방인지가 술을 한 잔씩 할 줄 아는 위인이라믄, 여편네가 이마빡에 땀을 찔찔 흘리며 마당 치우고 퍼대지고 앉아 햇살을 바라보며 한 숨 돌리느라 헉헉거리면, 개다리 소반에 하얀 백주발에 총각김치 댓개 얹어서 차려오지는 못할 망정, 창 문 열어 삐꿈이 내다보며 이런 말을 해서야 되겠냔 말이지

 

"야이, 못난이. 마당 다 씰었으면 여기 창문 방충망하고 유리창도 어떻게 좀 해보지"

 

막걸리 한 잔 생각에 입 안에 침이 츠르릅 고이는 판국에 저런 말 들으면 머리털끝까지 열 안 나겠어?

그래도 몸이 아파 저러고 누워서 이장 반장 입으로 다 하는 마당에 열 뻗히는걸 풀어 놓을 수도 없고

어이구..꾸욱 참고는 내일 닦아야지 지금은 기운없어 못 하겠구만..하고 입 안 말로 얼버무리고말지. 내일도 제수 음식 장만하다보면 그냥 넘어갈끼고. 그렇게 팔월 한가위는 성큼 코앞에 엎어지겠지.

 

그렇게 마당을 씰어서 한쪽 귀퉁이에다 낙엽 모다 놓고 불을 지르면, 마른 낙엽에 불 번지는 모양이 또 여간 이쁘질 않아. 낙엽 씬다고 주둥이가 댓발 나온 건 언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고 밤에 오줌이야 찔끔거리던 말든 불장난을 하는겨. 미처 불이 붙지 못한 낙엽에다가 불을 옮겨놓고, 시르륵 꺼질라하는데는  넓은 삽으로 실실 부채질을 하여 불을 되살려놓고는 낙엽 테두리를 따라 마지막 불빛을 내 놓고는 재로 사그러드는 모양을 보고 있을라믄 해지는 줄 모르고 볼 수있는 광경이여.

 

소쿠리며 양푼이며 양은솥이며 포도 일 한다고 다 뛰쳐나온 그릇들도 씻어서 엎어놓고 내년에 다시 쓸라면 정리를 잘 해 두어야하는 것이니까. 그러고는 장독간에 돌아가 포도주를 떴재요.

올해는 여기저기 맘 놓고 선물할라고 포도주를 서말은 담궜지. 소쿠리에 병을 꺼꿀백이 엎으니까 포도주가 왈칵 쏟아지네 건데기는 버리고 말간 술만 따로 병에 부어 담아놨지. 이제 2차 숙성 시간으로 들어간다요, 한 달 뒤에는 달착지근한 포도주가 만들어지겠지

그래도 막걸리나 소주 생각에 그 포도주는 손가락으로 한 번 찍어먹어 보고 말았네

뭣한 사람 같으면 포도주 한 사발 들이키고 말것을 나는 왜 그게 안 되나 몰라. 포도주는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한 잔을 먹어도 쐬주여. ㅎㅎㅎ

 

그러다 점심 먹고 장 봐온것 다듬고 이것저것 부엌살림 정리하다봉께 저녁이여. 아버님 들어오시기에 저녁 차려드리고 치우고 편지 한 장 쓸려고 앉았더니 고스방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네

고향으로 속속 명절을 쇠러 오는 부랄 친구들과 오랜만에 한 잔 한다구.

근데 고스방 델고 갈라고 그 친구가 아무리 설득을 해도 고스방은 다리가 저래서 안 나간다하네

그러더니 날 보고 대신가잖다. 얼씨구나. 술이 땡기는데 원정군이 오다니 세상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오신 것보다 더 반갑네 그랴.

 

얼른 웃저고리 걸치고 따라 나간다. 다른 친구들과 아내들도 나와있다

이 년전에도 이렇게 모여서 한 잔한 적이 있는데..세월의 속도는 나도 모르고 메누리도 모르는 것.

 

통닭집에서 닭고기 안주해서 소주 일 배. 원 샷!

어이구...술이 아니고 꿀이구만.

 

거푸 대여섯잔 마시고 나니 등때기가 뜨근하고 그 동안 개뿔이나 내세울것은 없어도 수시로 무너지는 소릴 내던 뭉친 억장이 스르르 풀려난다.

그렇게 마시며 얘기하다 오니 열한시다

여편네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집에 오니 간 큰 고스방은 코 골며 잠 자느라 정신이 없다

 

오랜만에...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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